지상의 빛

경계 없는 풍경(風景) 

이관훈 (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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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주상연에게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해이다. 내면의 심리적 변화와 함께 한동안 움츠렸던 창작도 실험과 도약으로 거듭난다. 2004년 세 번째 개인전 이후,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과 자극이 필요했던 그는 2007년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나 거기서 사진작가이자 SFAI(San Francisco Art Institute) 교수인 린다 코너(Linda Connor, 1944-)를 만나 사진적 프레임의 경계를 한 발짝 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로부터 4년간 린다에게 많은 영감을 받고 사진매체의 원론적 의미부터, 예술가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까지 많은 교감을 나눔으로 평생의 스승으로 연을 맺는다. 

미서부의 광활한 대자연과 린다로부터 받은 영감은 주상연이 평소 현실 너머 꿈꿔왔던 환영들이 자연 속에서 빛과 어울려 신비로운 태(態)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을 다시 보게 하였다. 한편, 주상연은 어린 시절 자연과 종교 속에서 하나가 되는 자유로운 경험과, 그렇게, 노니는 관점에서 물, 흙, 공기, 빛, 하늘 등의 자연적인 요소들과 무의식속에 호흡하는 영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어른이 되며 그 성장을 멈추게 된다. 그 이유는 국내 예술교육시스템의 오류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다년간 국내의 정통 예술 교육의 틀 속에서 감각의 한 쪽 기능, 즉 미술의 프레임1) 안에서의 중심적이고 전형적인 시각을 형성하게 되는데, 다행이었던 것은 그러한 학습이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그 안에서 의심과 반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주상연은 미술, 디자인, 사진을 전공한 후, 미술의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1999), <흙, 물, 하늘, 날개>(2000), <물 위를 걷다>(2004) 등의 작품들을 차례로 선보이며 작가로서 활동을 하였다. 신비한 이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가운데, 초기에는 기술적인 것과 표면의 조형에 치중하지만 점차로 ‘보고 보여지는 프레임’의 인식적, 심리적 환영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이어 점점 태(態)의 움직임이 발동하여 자연을 잉태하는 발아(發芽) 점인 빛과 공기를 중심으로 흙, 물, 하늘 등을 사유하는 체계를 이뤄나간다. 그는 사진매체의 한계를 경험하기도 하고, 그러한 사유체계를 구현시킬 수 있는 사진적 인프라의 부족으로 인해 스스로 일탈을 꿈꾸게 되는데, 그 시작점이 샌프란시스코다. 이는 근본적으로 잠재된 회귀 본능의 감성이 발동했다고 볼 수 있는데, 어린 시절의 본능적 감성이 어떤 이유로든 수면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심연의 깊이에서부터 내면의 파동을 일으켜, 뒤늦게 경계 없는 자유로운 지경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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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주상연은 미국 서부의 새로운 빛을 만나 한동안 막혀있던 사진 언어에 신선한 기운을 받는다. 언어로 규정되는 이성적 세계와 언어를 넘는 불명확한 세계의 간극에서 신비한 찰나적 현상을 목격하게 되고, 이때 그는 저 너머 잠재되었던 감성의 기억을 새로운 창(窓)2) 을 통해 환기시킨다. 무한한 풍경 속, 알 수 없는 세상에 자신을 풀어놓고, 본능의 욕망으로 대지를 들여다 보거나, 사막을 횡단하거나, 하늘의 구름을 쫓거나, 혹은 자신이 만든 정원 속의 작은 숲과 야생의 숲에서 몸을 내던지듯 사진기를 들고 감각의 촉수를 세운다. 이때 공기와 빛의 어울림으로 에워싼 모든 만물은 작가의 먹잇감이 되었고, 작은 먼지와 벌레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들판의 풀잎이나 잡초들에서부터 여기저기 널브러진 대자연의 현상과의 만남을 필름 속에 채집하였다. 작가에게 그 이미지들은 망망대해의 작은 모래알처럼 하찮고 막연한 것이었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이 사진들이 엮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바로 책으로 묶여진 <중력과 은총>시리즈이다. 

매체의 영역 안에서 사진을 재현으로서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력과 은총>은 메타적 시선으로서의 시각언어가 뒤섞여 인식의 지층을 뒤흔드는 독특한 문장력으로 필자에게 읽혀진다. 책자형식으로 만들어진 <중력과 은총>은 낱개의 이미지로는 의미가 서술되지 않는다. 서로의 이미지들이 행간의 이동을 통해 뒤섞여가며 수없이 많은 문장들3) 을 엮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만의 특성이자 열린 가능성이다. 그 속에는 이미지들의 혼돈과 충동이 요동을 친다. 자유로운 뒤섞임. 그 현상 속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열어놓는 무위의 태도로 다가선 것이다. 텍스트가 사라지고, 무거운 철학도 내려놓고, 프레임 속에 갇힌 의식도 던져버린 채, 그 무한의 공간에서 작가는 어떠한 경계도 없이 열린 태도를 취한다. 때문에 <중력과 은총>의 이미지는 언어의 명확성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이 작업에 철학적 숭고함이라는 텍스트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화려한 문체의 치장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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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의 빛>은 앞서 서술한 <중력과 은총>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니 같은 맥락이다.(‘지상의 빛’ 전시에 ‘중력과 은총’의 이미지들이 자연스레 섞여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개의 콘텐츠는 경계 없는 풍경을 던져놓고 한 이미지로서의 완결성보다는 경우의 수에 따라 관계 항이 달라지는 변수를 경험케 하고 있다. 사실 무한한 풍경 속에 일시점(一視點)의 환영은 존재하지 않고 다시점(多視點)의 전체적 환영이 존재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주상연이 이 풍경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득하는 지도 모르는 채, 직관으로 별거 아닌 무수한 점(點 : 흩어져 있는 작은 얼룩, 낱개의 이미지 언어)들을 수집하여, 오랜 시간의 사유체계를 통해 소화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깊은 신앙심에서 기인하는 동시에 체질적으로 동양적인 사유와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사이 공간’을 더듬어 내고, 현대사회에서 적용되는 객체와 주체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을 거부하는 동양 사상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끝없는 바다나 하늘같은 무한 공간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상연은 귀국 이후 이 땅에서 현실 저 편, 늘 꿈꾸던 ‘지성소’(至聖所)로의 순례를 떠난다. 그 여정에서 바다와 하늘이 경계 없이 맞닿아 하나로 뒤섞이는 풍경을 목격하거나, 늪과 숲, 나무를 들여다보았다. 숨(이미지와 호흡하기)을 고르며, 드로잉 하듯 빛을 따라 대상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작가에게 이 땅의 풍경은 몇 년 전 경험한 이국의 풍경과는 같으면서 다르게 인식된다. 시간이 다르고 빛과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 

이를 작가가 더 다르게 인식한 이유는, 돌아와 지난 3년 동안 현실적으로 겪었던 삶의 굴곡4) 에서 예술적 이상의 현실적 구현, 그 피곤함을 경험하며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태도가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통해 주상연의 이성과 감성은 언어적 사유체계에서 경험적 사유체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철학과 종교, 문학 서적을 탐독하며 인문학적 내면세계를 구축했다면, 마흔 전후의 현실적 경험들은 텍스트 상에서의 관념적 사유를 다시 몸으로 체득하며 삶의 터에 뿌리내리는 과정이었다 하겠다.

주상연은 오랜만에 볕景과 바람風을 쐬며, 그저 쉽고 자연스럽게 노는 관점의 태도로 자연을 보듬었다. 자연이 감상의 대상을 넘어, 그의 육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 더듬고, 살피고, 소요하며 태초의 기억의 잔영(殘影)을 불러오는 대상이 되었다. 그 풍경들은 마치 지상과 하늘이 만나 완전한 하나를 이루듯, ‘지상의 빛’ 아래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신기하게도 ‘지성소’를 향한 그의 이상이 전시장 ‘지상소’(地上所)에서 현실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인연이 신묘하지만, 무형의 공간에서 유형을 이루는 것이 예술의 구현임을 인지하여,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총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지상소’라는 구체적 장소와의 만남에 자신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빛을 새기는 두 장의 흑백사진으로 실존을 증거한다.

 

 

물위를 걷다

                                                                                 김영나 (서울대 박물관장)

 

주상연은 매우 특이한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은 정확하게 손에 잡혀지는 작품들이 아니고, 암시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물이나 심연의 세계, 하늘, 대기, 그리고 우주적 풍경에 관심을 가진다. 한동안 하늘과 물을 대조시키는 풍경 작품들을 시도한 것은 자연의 현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늘과 물의 상징적 대비를 추구한 것이었다. 구름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하늘과 고요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거센 물결을 예고하는 듯한 물을 결합해 주는 것은 빛이다. 빛은 모든 것은 묶어주는 가장 주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주상연의 이러한 풍경에 대한 관심은 거의 종교적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그의 작품에서의 무한하고 충만한 하늘은 빛의 근원이기도 하며, 일종의 천국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번 사진전에서는 하늘과 물의 풍경은 계속되지만, 오히려 물을, 그것도 물속의 인간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는 물속을 걷거나 떠다니는 사람들, 샤워하는 어린이, 빙판에서 스케이트 지치는 소녀 등의 작품들을 보여주면서 <물위를 걷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물은 사실 인간 생명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인간의 신체의 70%가 물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자궁의 양수 속에서 자라나고, 기독교의 경우 세례로 거듭난다. 그는 물은 모든 우주적 창조의 토대이면서 모든 씨앗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물이 죽은 자를 용해시켜 사물의 근원과 결합시키기 때문에, 우주적 순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번 작품을 위해 주상연은 5미터 높이의 대형 수족관을 빌려 두명의 모델과 함께 작업했다. 그는 물속에서 힘을 빼고 떠 있거나 움직이거나 또는 상승, 하강하는 모델을 찍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노출로 연속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산하고 연출하기 보다는 우연한 효과, 또는 피사체가 움직이면서 남겨지는 모습 속에서 인간의 에너지나 또는 비물질의 흔적을 찾아낸다.

물이라는 주제는 미술가의 오랜 주제의 하나였다. 중세나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최후의 심판의 주제에서 영혼이 물에 떠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났다. 19세기 낭만주의 작품에서 물은 난파선의 장면으로 거칠고 예측불허한 자연의 재현으로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물을 가장 즐겨 그렸던 화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흔들리는 수면위에 빛이 어떻게 반영하는가를 관심을 가지면서 수면의 위와 아래를 관찰하고 그렸다. 이들과는 다르지만 주상연 역시 수면을 대기와 물의 경계선으로 본다. 그는 수면을 두 가지 대조적인 물질들이 맞닥트리는 경계로, 언제든지 격렬한 드라마가 가능한 지점으로 보고 있다.

물은 가볍고 편안해 보이지만 물속에 있으면 물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은 물의 흐름을 따라가면 부드럽지만 힘을 주거나 물을 거스르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힘들다. 물 속에 있다는 것은 한편 다른 사람과의 통화가 어렵기 때문에 혼자라는 느낌을 가중시킨다. 주상연의 사진에서 물에 자신을 그대로 맡기고 행동의 의지가 박탈된 듯 중량감이 없이 부유하거나, 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물속을 떠도는 영혼의 모습 같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포르말린에 담겨진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들은 삶과 죽음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느낌이 샤워를 하는 소녀의 벗은 뒷모습이나 얼굴 등에서도 나타난다. 근본적으로 주상연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나 현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인체의 정신을 드러내는 자세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주상연의 사진작품들은 이제 낭만적이고, 초현실적이었던, 따라서 자칫 감상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었던 초기 작품의 약점에서 탈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더 집중되어있고 깊이를 가진다. 이 사진 작업을, 앞으로 더 탐구할 여지가 있는, 그러므로 좀더 지속되어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싶다. 

 

 

흙, 물, 하늘, 날개

상징의 심층구조를 찾아서                                                         

최봉림 (사진미학)

 

주상연은 상호이질적이고, 심지어 대립적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병치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몽타쥬 montage한다. 이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감각과 의식을 담아내는 형식으로서 몽타쥬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의식 속에서도 변치 않은 채 계속되는 근원적인 심리현실을 보여주는 형태로서의 몽타쥬로 보인다. 사실, 몽타쥬 기법은 심리적 심층구조를 원형적으로 드러내는 신화의 세계에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반인 반수들, 그 변신의 일화들은 이질적 형상들이 합체하는 몽타쥬이다. 더욱이 작가가 돈독히 참조한 기독교의 창조 신화는 몽타쥬에 해당하는 양상을 물과 대기의 생성에 적용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시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말씀 그대로 그려본다면, 하늘의 위와 아래는 물과 물에 몽타쥬처럼 맞닿아 있다. 신화가 구현되는 이러한 몽타쥬 기법을 통해 작가는 ‘흙, 물, 하늘, 날개’의 상징들이 원초적으로 간직한 인류학적 의미를 찾아가고자 했다.

깊이의 상상력은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빛을 물과 대지, 대기의 표상들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질료의 존재론적, 우주론적 의미를 찾는다. 빛과 더불어,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가 포착하여 감광지 위에 투사한 빛과 더불어, 평이한 돌, 수면, 떠오르는 물고기, 어둑한 숲 그리고 계단, 사다리는 태초의 순수, 끊임없는 초월, 우주적 영원을 육화했다. 대기에 스며든 빛은 존재의 무게를 떨구고 가볍게 비상하려는 영혼의 원초적 욕망을 흐릿한 새의 날개짓에 투사했다 (Wing-1, Wing-2). 결국 작가에게 있어서 빛은 지상과 피안, 유한과 무한, 태초의 공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시키며, 지상의 대상들을 원형적 상징의 무한성에 이르게 하는 신비이다.

주상연의 이름하여 “빛의 몽타쥬”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쥬와는 어떠한 공통점이 없다. 초현실주의 몽타쥬에서 보여지는 것은 꿈과 어둑한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억압받고 변형된 욕망의 이미지들의 결합, 그리고 통제하는 의식에서 해방된 충동적 이미지의 합체이나, 작가의 몽타쥬에서 보이는 것은 상반되는 질료의 불가해한 화해, 종종 구원과도 같은 최상의 조화의 모색이다. 창세기 28장 12절에서 야곱이 꿈에서 보는 하늘에 맞닿은 사다리는 하늘과 땅이 교통하는 신비로운 화해이다 (Trans-1). 피안의 빛에 이르는 긴 계단은 불가사의한 구원의 계시일 것이다 (Transit). 빛을 향해 떠오르는 물고기는 마태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를 쫓는 세례받은 영혼, IKHTHUS - 그리스어로 물고기인 동시에 ‘구세주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약어 - 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Ascend). 어둠을 수직으로 가르며 돌처럼 단단한 어둠의 혼돈을 밝히는 빛은 세상을 여는 첫날의 빛일 것이다 (Beginning). 물은 모든 생명력을 잠재하며, 거대한 모성의 수태력으로 모든 생명을 뿌리내리는 세계의 자궁이다 (Earth Bound-2). 형태 지워지지 않는 물은 역으로 모든 형태를 허용하는 잠재태이며, 땅으로 스미고, 땅에서 솟고, 빛으로 승화하는 물은 모든 형질과 섞여 세계를 발원하는 원초적 질료이다 (Fountain).

작가의 ‘흙, 물, 하늘, 날개’를 통한 원초적 상징에 대한 인류학적 탐색, 기독교적 신비의 탐구는 또 하나의 원형적 상징을 만난다. 그것은 다신교 문명의 창세 신화와 깊은 관련을 맺는 <알>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는 알에서 태어났다. 노른자의 황금은 하늘을 만들고, 흰자의 은은 대지를 만들었다. 이 기원의 신화는 상징의 확장 작용을 통해 왕국의 시조마저 알에서 태어나게 했고, 연금술사로 하여금 알에서 깨어나는 양상을 화금석, 즉 새로운 삶을 완성하는 형식으로 삼게 했다. 주상연은 이 탄생과 시작의 비밀을 해독하려는 의지 속에서 알의 각가지 형상을 정 중앙에서 응시했다. '검은 티끌 (Dark Dirt)’로 얼룩진 알의 형상은 원죄로 시달리는 넋의 표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바라보고 바라보자, ‘어둠‘으로 ‘더럽혀진’ 넋은 깊은 암흑 속에서 행성으로 빛났다. 존재의 무거움으로 죄지은 ‘불확실한 티끌’은 어느덧 거대한 우주의 별로 승화된 것이었다. 개체라는 하잘 것 없는 소우주는 거대한 우주의 개체로 탈바꿈하여 ‘어둠‘으로 ‘더렵혀진’ 인간의 운명을 떨쳐버렸다. 아홉 개의 때묻은 새알의 형상을 기록한 는 신화적 원형을 모색하고, 근원을 탐색하는 원초적 상상력이 존재의 무거움을 떨쳐버리고 보상받는 희귀한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박영택 (사진평론)

 

주상연의 사진은 하늘과 구름, 바다가 단순한 명사형으로 존재하는 풍경이다. 특별한 이야기가 배재된 채 다만 존재의 완전한 노출을 보여주는 편이다. 화면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하늘과 그 아래 수면이 맞닿은 지점은 단호한 경계로 나뉘어졌다. 작가에 의해 합성된 이 비어있는 풍경은 차분하고 잔잔하다. 고요가 무심하게 그 세계를 고독으로 응고시킨다. 모든 사진은 세계를 무거운 침묵과 공허로 떠낸 것이다. 한장의 사진에 들어와 박힌 풍경/세계는 침묵과 부동으로 그 자신의 확고한 존재감을 증명한다. 그것은 오로지 있었던 것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림이란 물감과 붓질의 얼룩에 불과할 뿐이지만 사진은 인화지에 맺힌 허구의 상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세계, 그 자체이다. 결코 그것에서 분리될 수 없다. 해서 사진은 본질적으로 재귀적 성향이 강하다.

이렇듯 사진이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확인과 부각에만 제한될수 있다. 주상연의 작업은 이 지점에서 파생되어 보인다. 사진을 통해 보이지 않는것, 볼수 없는 것까지 담아낼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이전에 궁극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자신의 인식과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이다. 사라져버리는것, 기록될수 없는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섬세한 감정과 느낌, 체험같은 것들을 한장의 사진에 담고자 한다. 모든 이미지, 사진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영원한 순환에서 자유롭지 않다.

주상연의 사진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도 늘상 보았던 평범한대상/자연이지만 일련의 배치, 편집에 의해 드러난 하늘과 수면, 물 등은 기묘한 기억과 상상의 장소로 탈바꿈 되면서 무언의 느낌을 던져준다. 그의 사진들은 결국'우주'를 보여준다. 그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경이로운 우주이다. 인간의 일상적 시간과 공간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우주는 언제나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의 대상이다. 인간의 인지 한계를 넘어서는 우주의 질서와 현상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들이 진하게 깔린 사진이다. 그 주제는 결국 우주, 인간, 나, 모든 물질 안에는 공통적으로 신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에 가깝다. 하늘이나 구름, 바다,물 등은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하나임을 보여준다, 같은 것들이 기압과 온도의 차이에 의해 뭉개구름이 되어 떠다니거나 바다를 이루거나 병에 담긴 물, 표면에 엉긴 물방울이 된다. 알콜램프의 연기가 하늘로 가볍게 기화되어 올라가는 장면과 그름이 맞물리는 풍경 역시 물질은 연기에서 나와 연기로 사라진다는 물리학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인식능력과 이해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세계를 늘 동경하고 지향하는 자신의 마음과 시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작업인 셈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운 세계의 동경과 그리움으로 무한하다. 꼬리를 물며 순환한다. 작가가 포착한 물이 이 우주적 질서와 순환의 궤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같은 주제는 자신의 경외심과 우주의 본질을 보는 시선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욕 아래 두개의 화면을 하나로 잇댄 구조로 펼쳐진다.